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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육군박물관 전경
육군박물관(사진 ①)은 우리나라 전통 국방 문화유산을 수집 및 전시하는 군사박물관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로, 크게 2개의 전시실이 있는 ‘전시동’과 학예실 및 강당 등이 있는 ‘사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2층)은 고대실로, 제2전시실(3층)은 현대실로 운영되고 있으며, 강당은 300석 규모로 영상 상영까지 가능하다.
1980년 제27대 학교장인 김복동 장군이 통일 후를 대비한 군사박물관의 필요성을 제의하였고, 이에 제21대 교수부장인 정형식 장군(당시 대령, 토목공학 교수)이 사업을 맡아 1981년에 설계를 시작하여 1983년에 준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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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상공에서 바라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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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전시실 배치
육군박물관의 핵심은 ‘忠’이다. 박물관은 두 개의 매스, 즉 장방형의 사무동과 원형의 전시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공에서 바라본 건물의 평면형태가 열쇠 모양을 닮아 ‘통일의 열쇠’를 형상화하였다고 다수의 매체에 기록되어 있다(사진 ②). 이는 당시의 건립 취지에 따른 것으로 사료되나, 처음 스킴을 잡은 곽재환 건축가(現 건축그룹 칸 건축사무소 대표이사, 당시 김중업건축연구소 수석 책임자)는 이렇게 일각에 알려진 ‘통일의 열쇠’는 사실무근이라고 한다. 그는 안중근 장군의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의 핵심인 ‘忠’을 생각하면서 박물관을 설계했으며, 박물관이 육사 교정의 한가운데 위치한 것처럼 육사를 거쳐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의 중심에 ‘忠’을 새기고, 아울러 육사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중심이 되라는 간절한 염원을 설계에 담았다고 한다. 김중업 건축가는 박물관 설계의 백미인 중정 부분을 제외하고 곽재환 건축가의 세세한 계획안을 대부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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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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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돌로 마감된 상부 테라스 보
박물관의 2, 3층에 위치한 전시실들은 중정을 돌면서 배치되었고(사진 ③), 수직 동선을 담당하는 계단실 또한 중정에 접해 있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 전시실을 향해 올라가면 박물관 중정으로 향하는 계단참이 나타나고, 그 위로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창들이 설치되어 있다(그림 ④). 계단참에 서서 유리창 밖을 내다보면, 커다랗게 뚫린 중정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보면 내부의 기둥들이 하늘로 높이 솟아 있어 사관생도들이 집총제식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중정은 외부에서 필로티 밑을 통과해서도 직접 접근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정은 박물관 내·외부 및 계단 등에서 계속하여 내다보이는 곳이기에 박물과 전체의 공간적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김중업 건축가가 의도했던 중정은 ‘빛과 물이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그는 1960년대부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물을 집어넣었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초의 생각은 검은 돌 위로 분수를 설치하고, 이 분수의 물이 대리석을 따라 흐르도록 함으로써 물의 유희가 중정에서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의 중정에서는 이러한 분수의 흔적만을 찾아볼 수 있지만, 김중업 건축가는 박물관이 육사의 중심에 있고 그 박물관의 중심에 중정을 배치시킴으로써 제자인 곽재환 건축가의 ‘忠’을 넘어 ‘忠’에 ‘忠’을 각인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지 문득 생각해 보았다.
한편 사무동 건물은 2층의 박스로 되어있고, 매우 엄격한 비례로 창과 벽이 조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돌로 마감된 상부의 굵은 테라스 보가 건물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데, 빗물받이는 풍경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사진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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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외벽의 검회색 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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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비상계단
특히 이 사무동의 백미는 외벽에 붙은 검회색의 타일이다(사진 ⑥). 김영림씨라는 타일 공급상에게 특별히 주문한 이 타일은 삼각형이기 때문에 빛의 방향에 따라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특히 해질녁 노을의 빛을 담아내는 타일의 빛 반사를 보노라면 감탄사를 금할 수 없다. 사무동을 돌아서 생도 기숙사인 화랑관으로 가다 보면 조형물처럼 생긴 비상계단을 볼 수 있다(사진 ⑦). 최초 장방향의 평행으로 되어있던 것을 비스듬히 틀어놓은 것으로 건축의 시각적인 면에서 다양함을 통해 세세한 부분까지도 설계자가 공을 들였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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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故 김중업(1922 ~ 1988)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의 피난민이었던 故 김중업 건축가는 1952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세기적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만나 그의 사무실에서 3년 2개월 동안 일하게 되면서 세계 현대건축의 흐름을 온몸으로 익히게 된다. 프랑스 대사관, 옛 한국미술관, 삼일빌딩, 올림픽 평화문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특히 프랑스 외교사절이 한국을 방문하면 외교업무가 아닌 건축물을 보기 위해서 반드시 프랑스 대사관에 들른다고 한다. 프랑스 대사관의 콘크리트 지붕을 한국형으로 말아 올린 것은 한국의 전통을 현대건축으로 승화시킨 백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에 대한 자긍심도 높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건축물에 대한 소신 또한 강했다. 이러한 타협을 거부하는 소신 때문에 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처가 그의 생명을 크게 단축시켰다고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기도 한다.
곽재환 건축가는 1980년 김중업 건축가를 만나 김중업 건축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서 1987년까지 수석 책임자로 함께 하였다. 그는 살고, 알고, 놀고, 풀고, 비는 사람의 다섯 가지 근본 행위에 기초하여 자연과 사람과 사회가 ‘집’을 매개로 하나가 되는 집 짓기를 추구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은평구립도서관, 흑빛청소년문화센터 등이 있다.
설계 착수로부터 3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백발의 노신사가 되어 육군박물관을 다시 찾은 곽재환 건축가는 “육사는 나라를 지키는 장군을 기르는 곳, 나라를 구하는 장군을 기르는 곳”이라며 설계 당시의 간절했던 애정과 염원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여러 번 끌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육사를 바라보는 온 국민의 사랑과 그 사랑을 받는 육사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국가 보위의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안중근 장군 흉상이라도 가져다 놓았으면…’하고 박물관을 떠나던 그의 모습에서 자식을 외지에 두고 떠나는 부모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자식의 역할에 대한 부모의 한없는 기대가 육사에 가득 전해지길 바라는 듯하였다.
출처: 육사신보 제606호(2019.3.15.)